어린 시절,
우리는 '퀴즈'를 풀며 똑똑해지고 싶었고,
'수수께끼'를 맞히며 기발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두 가지는 모두 질문으로 시작되지만,
전혀 다른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지금 내가 던지고 있는 질문들은 퀴즈일까,
수수께끼일까?
어떤 질문은 지식을 원하고, 어떤 질문은 상상을 초대한다.
질문은 언제나 문을 연다.
그러나 그 문 너머에 있는 것은 제각기 다르다.
퀴즈는 정답을 향해 똑바로 뻗은 길이다. '1+1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주저하지 않는다. 지식을 호출하고, 기억을 더듬는다. 정답은 명확하고, 틀리면 부끄럽다. 퀴즈는 틀린 사람을 걸러내고, 맞춘 사람을 돋보이게 한다. 그것은 교육의 도구였고, 평가의 기준이었다.
반면 수수께끼는 구불구불하다. "먹으면 먹을수록 배고픈 것은?"이라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고개를 갸웃한다. 그건 배움이 아니라 유희, 논리가 아니라 재치의 세계다. 이 세계에서는 '모른다'는 말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즐겁다. 수수께끼는 틀려도 웃을 수 있다. 그건 놀이고, 상상의 잔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모든 질문에 정답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을까?
언젠가부터 내 삶은 퀴즈 같았다. 계획표를 짜고, 정답을 외우고, 틀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 안에서 수수께끼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들. 아무도 정답을 가르쳐주지 않고, 나도 도무지 맞출 수 없는 질문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런 질문들 앞에서 살아있음을 느꼈다.
수수께끼는 늘 '그럴 수도 있음'을 품고 있다. 완전히 닫히지 않고, 살짝 열린 문처럼 여운을 남긴다. 그 안에는 유연함이 있고, 상상의 자유가 있고, 나다움이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 내가 던진 질문은 퀴즈였나, 수수께끼였나?
모든 것을 알고 싶던 시절에는 퀴즈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을 알 필요가 없다는 걸 아는 시절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수수께끼를 좋아하게 되었다. 답을 맞히는 기쁨보다, 엉뚱한 상상에 미소 짓는 기쁨을 택하고 싶다.
언젠가 이 세상이 수수께끼로 가득 찬 골목처럼 느껴진다면, 나는 기꺼이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싶다. 정답보다 여운을, 명확함보다 모호함을 사랑하게 되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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