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아침 누군가에게 물었다.
"너에게 보이는 빨강은
내게 보이는 빨강과 정말 같을까?"

상대방은 잠시 생각하더니 웃으며
"그거 어떻게 알아?"라고 답했다.
그렇다.
내가 보는 세상과 당신이 보는 세상이 정말 같은지,
우리는 결코 확인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퀄리아 문제( The Problem of Qualia )'다.
내가 경험하는 '감각의 질'을 타인과
완벽히 공유할 수 없다는 신비로운 난제.
철학자들은 이것을 '의식의 어려운 문제'라고 부른다.

처음 이 개념을 접했을 때,
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가 보는 '빨강'을 다른 사람은
내가 보는 '파랑'처럼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같은 색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는
단지 같은 대상을 가리키도록 배웠기 때문이지,
실제로 같은 경험을 한다는 증거는 없다.
빌리 아일리시의 노래 '일리야'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서로 다른 색으로 같은 것을 보고 있다면 어떨까?
당신 눈에 분홍색이 파란색으로 보인다면?"
대중음악 속에도
이런 철학적 질문이 스며든 것을 보면,
이 의문은 결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닌 듯하다.

우리는 뇌의 신경 활동을 촬영할 수 있고,
시신경이 어떻게 자극을 전달하는지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왜 '의식적 경험'이라는
특별한 것을 만들어내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뉴런의 발화가 어떻게
'붉음'이라는 감각질로 변환되는가?
이 간극을 과학은 아직 메우지 못했다.
철학자 프랭크 잭슨의 '메리의 방' 사고실험을 떠올려본다.
흑백 세계에서 태어나 색에 관한
모든 물리적 지식을 습득한
메리가 처음으로 빨간 사과를 볼 때,
그녀는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될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경험은 지식과 다르다.
설명과 체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른다.

영화 '그녀'에서 주인공 테오도르는
인공지능 사만다에게 슬픔을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경험이 없는
그녀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경험의 질,
퀄리아는 설명을 통해 전달되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공감을 어렵게 만든다.
산에 오르면
때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 순간을 사진으로 담아도,
아무리 화려한 언어로 묘사해도
직접 경험하는 그 감각을 온전히 전할 수 없다.
이것이 퀄리아의 본질이다.
설명할 수 없고,
공유할 수 없는 주관적 경험.
내가 느끼는 통증,
내가 맛보는 단맛,
내가 듣는 음악의 아름다움은 오직 나만의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세계에 완전히 들어갈 수 없다.
이 철학적 고독이 때로는 외롭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각자가 유일무이한 경험의 우주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기도 하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같은 하늘을 보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경험한다.
퀄리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신비 자체가 우리의 의식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한다.
내면세계의 깊이와 풍요로움을 일깨우는
철학적 수수께끼.
내일 아침,
나는 다시 일출을 보며 생각할 것이다.
지금 내가 보는 '이 빨강'은 오직 나만의 것일까?
그 답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나를 더 깊이 삶을 경험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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